규정


사라지는 건 쉬운 일이었지만,
그래서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것과는 별도로
사라진다는 건 아주 특별한 일이기도 했어.

수많은 사람들이 사라진 길 위에서.
끝내 사라지지 않는 나를 바라 보며 그걸 알게 된 거야.

내가 사라지지 않는 건. 사라질 만큼 특별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굳이 사라질 것 까지는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라질 만한 일들을 해온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나는 사라지지 않는 거였어.

나라는 사람은 그저
세상의 어딘가에서 어딘가로 이동하는 것으로 규정된 사람.
세상의 어딘가에서 뿌리를 내린 채 고정된 것으로 규정된 사람.


나는 아주 멀리 도망치려고 했었어.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면 최소한 그 밀도가 아주 낮은 곳으로.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 곳으로
도망쳐 버리고 싶었어.

그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곳은 단 하나였어.
이곳은 어쩌면 그런 곳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지.
나는 언젠가, 세상에서 밀려나게 되면 이곳으로 도망치려고 했었어.

그런데 이곳도, 도망치기엔 적당한 곳이 아니었어.

세상의 밀도는 옅었지만, 옅기만 하다면 의미가 없다는 걸
이곳에 와서 알게 되었어.
어쨌든 세상이라는 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거니까.
어떻게든 남아있는 세상을 견뎌야 했고.
그것을 견디려면 빈 공간을 빈 채로 남겨 둘 수가 없었으니까.

나는 이곳에 도착해서 아주 잠시 그곳에 서 있었을 뿐이었지만.
그곳에서 일어날 세상의 일들이 여태 겪어왔던 것처럼 선명하게 느껴져서.
이곳에서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절망했었어.

이제 나는 어디로도 도망 칠 수 없었어.
아무리 멀리 도망쳐도 그것이 이 세상의 어딘가 라고 한다면.
그런 일들이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나라는 사람은 이제.
세상에서 사라질 만큼 특별하지 않은 것으로 규정된 인간.
어디로도 도망 칠 수 없을 만큼 하찮은 것으로 규정된 인간.


돌아가는 버스에 오르면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어.

내가 바라는 것들은 바란다고 이루어지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런 걸 알게 되었으니까.

나는 사라지지 않아. 영원히.
세상도 사라지지 않아. 영원히.
도망 칠 수도 없어. 영원히.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아. 영원히.

그러니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어.
아무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어.


나라는 사람은 생각하는 것이 의미 없는 것으로 규정된 인간.
나라는 사람은 바라는 것이 헛된 것으로 규정된 인간.


아직 버스는 멈춰 있지만.
어쨌든 돌아가게 될 테지만.
떠나온 내가 돌아가는 건 아닐 것만 같았어.

예전과는 다르게 규정된 어떤 인간이
버스에 타고 있는 것만 같았어.

by kamain | 2011/02/08 22:47 | protected:image | 트랙백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